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여론조사의 시초는1936년 미국 대선 여론조사로 볼 수 있습니다. 

img02고대 로마의 황제가 세금 징수를 주 목적으로 대대적인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정확한 조사를 할 요량으로 호적지(고향)에서의 인구 조사 방법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라틴어인 Censere에서 기원한 Census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Census, 즉 전국적 인구조사의 기원이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사, 리서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여론조사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1824년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이 맞붙었던 7대 대통령 선거에서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주민들이 모의투표(straw poll)를 실시하면서  여론조사가 첫 선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여론조사의 시대가 열린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앨프리드 랜든이 대결한 1936년 대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 선두업체였던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사는 전화 가입자와 자동차 소유자들 1000만명에게 주먹구구식으로 우편엽서를 발송해 회수한 결과를 바탕으로

랜든의 승리를 점쳤다가 망신을 당한 반면, 신생 회사인 갤럽은 과학적인 표본추출을 통해 겨우 1500명을 면접조사해서 정확하게 결과를 예측했습니다.

이 사건은 통계학에서만 머물던 표본 추출 방법이 세상으로부터 주목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론조사가 항상 정확했던 것은 아닙니다.

공화당 후보인 토머스 듀이와 민주당 후보인 해리 트루먼이 치열한 접전을 펼쳤던 1948년 제33대 대통령선거에서 시카고 트리뷴지는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듀이가 트루먼을 이기다’라는 제목으로 투표일에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지만 이 역시 역사적인 오보로 기록됩니다. 당시 여론조사가 틀린 이유는 ‘날씨’’란 분석도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우세한 일리노이와 캘리포니아에선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투표율이 떨어진 반면,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남부지역에는 날씨가 좋아서 투표율이 상승했다는 주장 입니다.

또 모든 유권자가 표본으로 선정될 확률이 동일한 확률표집(probability sampling)이 아니라 지역과 성별, 연령별로 미리 결정된 숫자만을 채우는 비확률표집인

할당표집(quota sampling) 때문에 발생한 오류란 지적도 있습니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도 보수당의 대처정권을 계승한 존 메이저 총리가 승리 했지만, 갤럽과 해리스 등 주요 조사기관들은 할당표집에 의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해

모두 노동당이 정권을 교체한다고 예측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에 본격적으로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1987년에 치러진 제 13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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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론조사의 시초는 577년 전인 세종 12년(1430년) 토지의 질이나 농사의 풍작 여부에 관계없이 똑같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 실시에 대한 여론조사로 볼 수 있습니다.

호조(戶曹)가 5개월간 총 17만2648명이란 대규모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는 찬성 9만8657명, 반대 7만4149명이었고, 이에 따라 세종은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이를 시행할 수 없지만, 좋다는 사람이 많으므로 법을 시행한다”고 공포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과학적인 표본추출에 의한 여론조사는 아니었겠지만, 민심을 중시하고 이에 따라 정치를 하려고 했던 세종대왕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에 본격적으로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1987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였습니다. 직선제 개헌으로 인해  비로소 민심을 물어볼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은 권위주의 정부에 오랜 기간 영향을 받은 많은 유권자들이 자신의 솔직한 정치적 태도를 표현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정확한 선거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기는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 후 1997년 대선부터 출구조사가 실시됐고 선거 종료와 동시에 선거 예측이 발표되기 시작했습니다.